외국계 행동주의 vs 재벌 승계 전략
■ 편집자 주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흐름을 바꾼 사건들을 되짚는 [그때 그 사건] 시리즈.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단순한 M&A가 아니었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가 국내 최대 재벌의 지배구조 개편에 정면으로 맞선 첫 대형 분쟁이었다. 이 사건은 국민연금의 역할, 소액주주 권리, 그리고 한국 자본시장의 공정성 논쟁을 지금까지도 이어지게 만든 분기점이었다.
■ 시작은 ‘승계 시나리오’였다
2015년 5월, 삼성그룹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발표했다. 표면적 이유는 사업 시너지와 지배구조 단순화였다. 그러나 시장의 시선은 달랐다.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핵심 퍼즐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합병 비율은 제일모직 1주당 삼성물산 0.35주. 문제는 삼성물산 주주들이 느끼기에 이 비율이 지나치게 불리하다는 점이었다. 당시 삼성물산은 보유 자산 대비 주가가 크게 저평가돼 있었고, 합병 구조가 특정 주주에게 유리하게 설계됐다는 논란이 번졌다.
그때 등장한 이름이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였다.
■ 엘리엇의 등장…한국 자본시장에 던진 질문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약 7%를 확보한 뒤 합병 반대를 선언했다. “합병 비율이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단순한 투자 의견이 아니었다.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고 공개적으로 경영진을 비판하며 전면전을 선언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외국계 펀드가 국가 대표 기업의 전략을 흔드는 것 아니냐는 반감도 컸다. 반면 글로벌 투자자들은 “소수주주 권리를 위한 정당한 문제 제기”라고 평가했다.
한국 자본시장은 그 순간부터 국제 무대의 중심에 놓였다.
■ 운명의 주총…국민연금의 선택
결전의 날은 2015년 7월 삼성물산 임시주주총회였다. 합병 성패의 키는 국민연금이 쥐고 있었다. 국민연금은 당시 삼성물산 지분 약 11%를 보유한 최대 기관투자자였다.
결국 국민연금은 합병 찬성표를 던졌다. 합병안은 근소한 차이로 통과됐다.
이 결정은 이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국민연금이 왜 찬성했는지, 정부와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의사결정이 독립적이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다. 훗날 국정농단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사건은 단순한 기업 분쟁을 넘어 정치·사회적 이슈로 확장됐다.
■ 엘리엇의 패배, 그러나 남겨진 균열
합병은 성사됐고 엘리엇은 패배한 듯 보였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엘리엇은 이후 국제투자분쟁(ISDS)을 제기하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대주주 중심 의사결정과 기관투자자의 독립성 문제가 해외 투자자들의 주요 리스크로 인식된 순간이었다.
한 외국계 펀드 매니저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삼성물산 사건은 한국 시장이 얼마나 글로벌 기준과 다른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 그 후, 한국 자본시장은 달라졌나
이 사건 이후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의가 가속화됐고,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투명성이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합병 비율 산정과 소액주주 보호에 대한 논의도 한층 강화됐다.
그러나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일부에서는 “국가 전략 산업을 지켜낸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지배구조 개혁의 기회를 놓친 순간”이라고 말한다.
■ 그래서, 누가 이겼는가
삼성은 승계 구조를 완성했고, 엘리엇은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자본시장을 흔든 존재로 기록됐다. 국민연금은 이후 수년간 이어진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한국 시장은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기업의 전략과 주주 권리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2015년 여름의 삼성물산–엘리엇 전쟁은 단순한 합병 분쟁이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이 글로벌 룰과 어떻게 충돌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