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주주가치냐 먹튀냐”…한국 시장 흔든 아이칸의 10개월

■ 편집자 주

한국 자본시장은 지난 20여 년간 거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재편된 재벌 지배구조,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의 등장,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그리고 최근 집중투표제와 자사주 소각 논쟁까지 — 기업 지배구조는 더 이상 일부 전문가만의 논의가 아닌 시장 전체의 핵심 이슈가 됐습니다.

본지는 연재 기획 [그때 그 사건]을 통해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흐름을 바꿔놓은 주요 사건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경영권 분쟁, 주주행동주의의 확산, 중복상장 논쟁,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강화 등 각 시기의 결정적 장면을 되짚으며, 오늘날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밸류업 논쟁의 뿌리를 살펴봅니다.

이 연재는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닙니다. 당시에는 논란이었던 선택들이 현재 시장에서는 어떤 의미로 재해석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지배구조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독자와 함께 고민해 보려 합니다. 사건의 배경과 이해관계, 시장의 반응을 입체적으로 담아 한국 자본시장의 변화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사진=임정문]

KT&G 경영권 분쟁, 행동주의 시대의 서막이 되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자본시장은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구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외국인 투자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고,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이 한국 기업의 현금 활용 방식과 지배구조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사건이 바로 칼 아이칸(Carl Icahn)과 KT&G의 경영권 분쟁이다. 이 사건은 한국 시장에서 ‘주주가치’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계기였지만, 동시에 행동주의 투자에 대한 불신과 논쟁을 함께 남겼다.


■ 지분 5% 공시로 시작된 압박…한국 기업 첫 ‘행동주의 충돌’

분쟁의 시작은 2006년 초였다. 아이칸 연합(Icahn Partners Master Fund LP 등)은 KT&G 지분 5% 이상을 취득했다고 공시하며 공개적으로 경영진을 압박했다. 당시 KT&G는 담배사업에서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창출하고 있었지만, 시장에서는 과도한 현금 보유와 보수적인 투자 전략이 기업가치를 낮추고 있다는 평가가 있었다.

아이칸 측은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소각, 현금 활용 전략 수정 등을 요구했다. 공개매수 가능성까지 언급되면서 시장에서는 실제 경영권 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형성됐다. 외국계 행동주의 투자자가 한국 대표 기업을 공개적으로 압박한 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투자 갈등을 넘어 한국 기업 지배구조가 글로벌 기준과 처음으로 정면 충돌한 사례로 평가된다.


■ 방어에서 변화로…KT&G, 주주환원 정책 강화

KT&G 경영진은 초기에 강경 대응을 선택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회사는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 정책을 발표했고, 이는 당시 국내 기업 가운데서는 비교적 공격적인 주주환원 정책으로 평가됐다.

증권가에서는 이를 두고 “외부 압박이 기업 전략 변화를 촉발한 사례”라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KT&G는 현금 활용 방식을 재검토하고 장기 성장 전략을 재정비했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회사 체질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한 증권사 관계자는 “아이칸이 제기한 문제들이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기업 운영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 측면이 있다”며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주주와의 소통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 10개월 만의 철수…1500억원 차익과 ‘먹튀’ 논란

그러나 분쟁의 결말은 예상과 달랐다. 아이칸 연합은 지분 취득 약 10개월 만에 KT&G 주식을 대량 매각하며 사실상 시장에서 철수했다. 시간외 대량매매를 통해 약 700만주가 매각됐고, 총 매각금액은 4000억원을 넘었다.

당시 집계에 따르면 아이칸은 약 3351억원을 투자해 주식 매각과 평가이익, 배당금을 포함해 약 1500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거둔 것으로 추정됐다. 수익률은 약 44% 수준이었다. 환율 하락에 따른 환차익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실제 성과는 더 컸을 것으로 분석됐다.

문제는 아이칸이 공개매수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경영권 장악 의지를 보였던 점이었다. 결국 단기간 내 이익을 실현하고 떠나자 시장에서는 “전형적인 단기 차익형 펀드”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일부에서는 행동주의 투자에 대해 ‘먹튀’라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 행동주의의 양면성…한국 자본시장의 첫 시험대

아이칸의 철수 이후 KT&G 주가는 경영권 이슈가 사라지며 다시 펀더멘털 중심으로 움직였다. 단기적으로는 대량 매각 물량 부담과 투자심리 위축으로 변동성이 있었지만, 회사의 실적과 주주환원 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사건을 두고 상반된 평가가 이어졌다.

긍정적인 시각에서는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강화 ▲글로벌 기준의 거버넌스 압박 등장 ▲기업 전략 변화 촉진을 성과로 꼽았다.

반면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공개매수 언급 후 조기 철수 ▲단기 차익 중심 투자 ▲행동주의 투자에 대한 시장 불신 확대를 지적했다.

결국 KT&G 사건은 행동주의 투자가 기업가치 제고라는 명분과 단기 수익 추구라는 현실 사이에서 어떤 논쟁을 낳는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로 남았다.


■ 이후 한국 시장에 남긴 흔적…행동주의 시대의 출발점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이칸–KT&G 분쟁은 한국 자본시장의 전환점이었다. 이후 소버린과 SK의 경영권 분쟁, 엘리엇과 삼성물산 합병 논란 등 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지며 행동주의는 한국 시장의 주요 변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최근 상법 개정 논의와 집중투표제 확대, 자사주 소각 요구 등 주주권 강화 흐름을 고려하면 당시 아이칸의 압박은 단순한 투자 이벤트를 넘어 한국 기업 지배구조 변화의 초기 신호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이칸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업의 현금은 누구를 위해 쓰여야 하는가, 그리고 주주가치라는 명분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KT&G 사태는 한국 자본시장이 이 질문에 처음으로 직면했던 순간이었다.

■ 그리고 20년 뒤…KT&G를 둘러싼 또 다른 행동주의

흥미로운 점은 아이칸 이후 약 20년이 흐른 2020년대에도 KT&G가 다시 행동주의 공세의 중심에 섰다는 사실이다. 싱가포르계 행동주의 펀드 플래시라이트캐피털파트너스(FCP)는 2022년 이후 KT&G 지분을 매입하며 매년 주주총회에서 경영진을 압박해왔다.

FCP는 배당 확대, 지배구조 개선, 집중투표제 유지 등을 요구하며 대표이사 선임 방식 변경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대표이사 선임 시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려는 정관 변경안을 두고 “황제 연임을 위한 꼼수”라고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아이칸 때와는 다소 달랐다. 일부 투자자들은 FCP의 문제 제기를 주주친화적 행동주의로 평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기 주가 부양과 차익 실현을 노린 움직임이라는 비판도 커졌다.

실제로 FCP는 주총에서 반복적으로 표대결을 시도했지만 주요 안건이 잇따라 부결됐고, 지분율이 0.5% 아래로 낮아지면서 주주제안 요건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투자업계에서는 “소액주주들이 점차 등을 돌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 아이칸에서 FCP까지…반복되는 질문

아이칸과 FCP의 사례는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이지만 공통된 질문을 남긴다. 행동주의 투자는 기업가치를 높이는 감시자인가, 아니면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외부 압력인가.

KT&G는 2000년대에는 글로벌 행동주의의 첫 시험대였고, 2020년대에는 국내 행동주의 논쟁의 상징적 기업이 됐다. 주주가치와 경영 안정성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이칸은 10개월 만에 떠났지만, 행동주의라는 흐름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KT&G는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기업의 전략은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가, 그리고 행동주의는 어디까지 정당한가. 한국 자본시장은 여전히 그 답을 찾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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