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공식적으로 4남 6녀를 뒀다. 딸 여섯명 중에서 유일하게 사업을 물려받은 이가 이명희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이다.
이 명예회장은 아버지 비서 역할을 하면서, 간식으로 올릴 과일도 미리 맛보고 선호하는 당도인지를 따지는 세심한 보좌를 했다. 그런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백화점에 첫 출근하기 전날 이병철 창업주는 “누군가에게 맡겼으면 전적으로 신뢰하고 서류에 사인하려고 하지 마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딸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법적 책임을 질 일은 직접 하지 말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래선지 신세계와 이마트에는 이 명예회장, 남편 정재은 명예회장, 아들 정용진 부회장, 딸 정유경 사장 중 그 누구도 등기임원으로 올라간 이가 없다.
등기임원은 모두 전문경영인이고, 이들 가족은 모두 미등기임원이다. 물론 미등기임원이지만 M&A나 투자 결정 같은 중요한 결정은 모두 내릴 수 있다.

창업주의 가르침은 여전히 삼성가에 유효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사촌인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미등기임원이니 말이다. 2016년 삼성전자 사내이사로 등기임원이 됐던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정부 국정 농단 사태로 형사 처벌을 받으면서 물러났다.
풀려난 현재는 보수를 받지 않는 미등기임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최근 유럽 출장길에 올라 공급망을 점검하고, M&A 대상 기업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현재 ‘취업 제한’이라는 조치를 받았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5억원 이상 횡령 배임죄가 확정되면 5년간 취업이 제한된다. 그는 최순실에게 뇌물(말)을 제공하면서 배임죄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졌고, 유죄가 확정됐다.
그렇다면 이 부회장은 취업제한 조치를 위반한 것 아닐까. 그러면 추가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경찰은 최근 이와 관련해 이 부회장에게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8월 법무부도 미등기임원인 이 부회장은 취업제한을 어기지 않았다고 확인해 준 결과다.
이 부회장의 아버지인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비자금 사건으로 2008년 등기임원을 사임했지만, 그 후로도 미등기임원으로 경영하는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사실상 등기임원만 아니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등기임원이 아니라 일개 직원 신분이어도 대주주 일가가 할 수 없는 일은 없으니 사실상 이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지는 셈이다.
만일 대주주 일가가 아닌 일반 직원이 같은 죄를 저질렀다면 복직은커녕, 제대로 된 직장에도 다닐 수 없는 가혹한 꼬리표가 따라다녔음이 분명하다.
이 같은 법 제도는 대주주 일가가 미등기임원으로 머무르도록 장려한다는 점도 문제다. 이사회 의장이나 대표이사 위에 있는 미등기임원이 존재하면, 사실상 이사회는 독립성을 잃고 형식적인 존재가 되기 마련이다.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54개 대기업집단에서 대주주 일가가 미등기임원으로 이름을 올린 경우는 176건에 달했다. 이들 중에서는 여러 계열사 임원을 겸직하며 연봉 수십억원을 받는 이들도 있다.
최근 취임한 홍승욱 수원지검장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가 현실화하는 일이 없도록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검찰의 책무를 다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검찰의 노력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제대로 된 수술이 필요하다. 정치권의 각성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