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경제 양대 축인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가 추구하는 기업 지배 구조는 큰 차이가 있다. 적어도 ‘미국 기업들’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병수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20일 발간한 ‘실리콘밸리를 키운 미국 지배 구조’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미국의 전통적 기업 지배구조는 한마디로 자본 앞에 평등하고 자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한다.
미국 자본주의 문화에서 주주행동주의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사모펀드는 미국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서 연구원은 “사모펀드는 지속적인 자사주매입소각과 배당을 통한 주주 수익률 극대화를 추구한다”면서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당 이익을 극대화하는 관점에서 경영진에 대한 보상을 주식으로 주는 스톡옵션은 절대 악”이라고 말했다.
워런 버핏이 실리콘밸리 기술주에 투자하지 못한 이유
버핏은 돈이 된다고 판단하면 국채, 원자재, 정크본드 등 다양한 자산과 페트로차이나, BYD, 포스코 등 해외 기업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그런 그가 미국 IT기업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 연구원은 “버핏이 생각하는 기업 지배구조 즉 전통적 주주 자본주의 관점에서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앞서 언급한 주주 자본주의 관점과는 거의 정반대의 지배 구조로 운영된다”고 설명했다.
실리콘밸리 기술기업들은 창업자를 포함한 개발진 등 회사 내 핵심 인력에게 스톡옵션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마치 월급이나 성과급을 지급하듯이 계속 스톡옵션을 발행해 신주를 발행하는 것이 관행적으로 이뤄진다.
사업을 운영할 때 수익화 그 자체보다는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회사의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열중한다. 그렇다 보니 늘 회사의 이익은 실제 달성 가능 이익보다 낮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투자를 위해 회사 내에 큰 규모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배당이나 자사주매입은 안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수합병도 회계에 기반한 전통적 기준보다 훨씬 비싼 금액으로 빈번하게 진행하는데 회사 자금을 사용한다. 회사가 번 돈으로 주주환원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 지배 구조 측면에서는 주주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주주자본주의 원칙 흔드는 ‘복수 의결권’
서 연구원은 “하지만 그 무엇보다 전통적 주주 자본주의 입장에서 실리콘밸리 기업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제도는 아마도 복수의결권 주식일 것”이라고 했다.
복수의결권 주식은 보통주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을 가진 주식으로, 최대주주나 경영진이 실제 보유한 지분보다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서 연구원은 “복수의결권은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고, 주주는 동일한 자본에 대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주주 자본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제도”라면서 “그럼에도 이런 제도가 주주 자본주의가 가장 확고하게 자리 잡은 미국에서 실리콘밸리 기업의 상장 시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일반 주주들은 의결권 없는 경우도…
2017년 상장된 스냅(Snap)은 의결권이 없는 Class A 주식만 상장했다. 즉 스냅의 상장 주식을 100% 가지고 있어도 스냅의 의결권에는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
상장된 Class A 주식 이외 의결권 1주를 가진 Class B 주식과 의결권 10주를 가진 Class C 주식이 있는데, 이들 주식은 상장되지 않고 회사 임원과 초기 투자자들에게만 주어지며 특히 Class C 주식은 공동창업자인 에반 스피켈 CEO와 바비 머피 CTO만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지금도 두 명의 공동창업자가 전체 의결권의 99% 이상을 통제한다. 사실상 공동창업주 둘이서 회사를 맘대로 운영할 수 있고, 이들이 외부 자본에 의해 경영권을 잃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에서도 무의결권 주식만 상장한 경우는 스냅이 처음이라 IPO 당시에도 말이 많았지만 결국 승인됐다.
2020년 상장된 소프트웨어 회사인 팔란티어는 의결권 1주인 클래스 A 주식을 상장했는데, 일반적인 의결권 10주인 클래스 B 주식뿐만 아니라 특별 의결권을 가진 클래스 F 주식까지 발행해 논란이 됐다.
클래스 F 주식은 회사 핵심 내부자인 알렉스 카프 CEO와 피터 틸 이사회 의장 그리고 스테판 코헨 3인만 회사에 남아있으면 영구적으로 보유하는 주식으로 이들 3인 중 어느 한 명이라도 회사에 남아있는 한 다른 주식에 상관없이 과반수의 의결권을 보장한다.
클래스 F 주식의 의결권은 3인 중 몇 명이 회사에 남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지는데,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에 따라 최소 49.99%(3인이 모두 남은 경우)에서 최대 66.09%(스테만 코헨만 남은 경우)까지 바뀐다. 사실상 회사에 남아있는 3인이 회사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구조다.
서 연구원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가 기존 산업에서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크고 그런 부가가치가 소수의 핵심 인력과 문화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창출돼,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고서도 자본에게 이득이 된다면 자본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면서 “그리고 실리콘밸리는 지난 10년간의 혁신을 통해 그들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실리콘밸리 방식의 기업 지배구조가 허용하는 방식을 당초 목적과 달리 특정 개인의 사익에만 이용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이런 기업지배구조를 이끄는 이해관계자들이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퇴출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