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정기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국내 주요 기업들이 집중투표제 도입과 정관 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전자·화학 계열사에 이어 현대차그룹까지 제도 변화에 본격 대응하면서, 개정 상법 시행을 계기로 국내 기업 지배구조가 구조적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아, 집중투표제 도입…현대차그룹 지배구조 변수로
기아는 내달 20일 정기주총에서 집중투표제 적용과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를 정관에 반영하는 안건을 논의한다.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임 시 주주가 보유 주식 수에 선출 이사 수를 곱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어 소액주주 영향력을 높이는 제도다.
현대모비스 역시 집중투표제 관련 정관 개정안을 상정하면서 현대차그룹 핵심 계열사들이 동시에 제도 도입에 나선 모습이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변화가 단순한 제도 정비를 넘어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현대자동차가 기아 지분 약 34%를 보유하고, 기아가 현대모비스 지분을 들고 있는 구조에서 이사회 구성 변화가 지배력 균형에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부에서는 향후 정의선 회장 개인 지분과 계열사 보유 지분 간 교환 등 지배구조 재편 가능성도 거론된다.
삼성·LG·한화까지…배제 조항 삭제 확산
이번 주총 시즌의 핵심 키워드는 ‘집중투표제 배제 조항 폐기’다. 삼성전자·삼성전기·LG전자·LG디스플레이·한화오션 등 주요 상장사들이 기존 정관에서 집중투표제 적용을 막던 조항을 삭제하거나 관련 문구를 정비하고 있다.
이는 올해 9월 시행 예정인 2차 상법 개정안의 영향이 크다.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에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가 예정되면서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거버넌스 구조를 손보고 있다는 해석이다. 동시에 정부의 기업 밸류업 정책과 ESG 평가 압력도 작용하고 있다.
독립이사·전자주총…이사회 룰 자체가 바뀐다
정관 개정은 단순히 집중투표제 도입에 그치지 않는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은 사외이사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하고 전자주주총회 도입을 추진 중이다. LG전자는 감사위원 분리선출 인원을 확대하고 의결권 제한을 강화하는 안건을 올렸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조항도 다수 기업에서 반영되고 있다. 이는 개정 상법 이후 이사회 책임 범위가 크게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주의 시대 진입…거버넌스 프리미엄 vs 경영권 리스크
시장에서는 집중투표제 도입이 행동주의 펀드와 기관투자가의 영향력 확대를 촉진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배제 조항을 선제적으로 삭제한 기업은 제도 리스크를 줄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밸류에이션에 ‘거버넌스 프리미엄’이 반영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재계에서는 경영권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특히 이사회 교체 가능성이 높아지는 만큼 기업들이 이사 임기를 분산하는 시차임기제나 초다수 결의제 등 새로운 방어 장치를 도입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