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가 명문화됐지만,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 회복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왔다.
23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주최 긴급 좌담회가 열렸다. 이날 심혜섭 변호사는 “지난 1년간 이룬 제도 개혁은 분명 크고 자랑스러운 성과지만, 그것이 자동으로 기업 행동을 바꾸지는 않는다”며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를 실질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후속 개혁”이라고 강조했다.
심 변호사는 먼저 최근의 상법·자본시장 개혁을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입법화, 집중투표제 의무화 확대, 감사위원 분리선출 강화 등은 한국 자본시장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나라들은 그 사이에도 계속 개혁을 이어오고 있다”며 “우리가 이 정도에서 멈추면 자본은 다시 해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자본을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희소한 전략 자원”이라고 규정했다. AI 산업 경쟁, 지정학적 리스크 대응,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국내 자본시장이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데, 현재 구조는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주 보호가 약한 시장에 자본이 머물 이유는 없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주주 충실의무에도 소액주주 강제 축출…시장 신뢰 훼손”
심 변호사는 최근 논란이 된 현금 대가 포괄적 주식교환 제도를 대표적인 문제 사례로 지목했다. 이 제도는 원래 기업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현실에서는 저평가된 상장사의 소액주주를 강제로 내보내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과거에는 95% 이상 지분을 확보해야만 소액주주를 축출할 수 있었지만, 포괄적 주식교환에 현금 대가가 허용되면서 3분의 2 지분만으로도 사실상 강제 퇴출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주주 충실의무가 입법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심 변호사는 “PBR 0.5 수준의 기업에서도 주주총회 특별결의만으로 소액주주가 현금 받고 퇴출될 수 있다는 인식이 시장에 퍼지고 있다”며 “이런 사례가 쌓이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의 주주 충실의무는 선언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제도의 취지가 실제 관행에서 잠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법원의 태도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법원이 주식교환 규정을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해석하면서 제도의 취지, 즉 소액주주 보호라는 목적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추상적인 충실의무보다 구체적인 규정이 우선된다는 논리만으로는 시장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주총회 14일 통지, 실질적 권리 행사 막는다”
심 변호사는 주주 권리 행사의 가장 큰 구조적 문제로 주주총회 제도를 꼽았다. 현행 상법상 주주총회 소집 통지 기간은 14일인데, 이는 실질적으로 주주들이 위임장을 모으고 의견을 결집하기에는 턱없이 짧다는 것이다.
그는 “14일 규정 때문에 실제 위임장 권유가 가능한 기간은 9일 남짓에 불과하다”며 “외국인 투자자는 더 이른 시점에 의결권 행사가 마감돼 사실상 설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반면 글로벌 스탠다드에서는 최소 3주, 길게는 4주 이상의 권유 기간을 보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주주제안, 집중투표제, 분리선출 확대 등 새로 도입된 제도들이 주주총회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그는 “제도는 바뀌었는데 싸울 수 있는 시간과 수단은 그대로라면, 결국 주주 권리는 형식에 그친다”고 말했다.
“대만 투자자보호센터, 한국도 검토해야”
심 변호사는 대만의 투자자보호센터 사례를 한국이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만은 자본 유출 위험이 큰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준공공 성격의 전문 기관을 통해 주주 대표소송과 주주총회 대응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해당 기관은 모든 상장사 지분을 보유한 상태에서 변호사들이 직접 주주총회에 참석하고, 문제 있는 안건에 대해 질문과 소송을 병행한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과 입증 책임을 공적 기관이 대신 수행한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크다”는 평가다.
심 변호사는 “한국에서도 주주 대표소송은 비용·입증·공탁 부담 때문에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며 “이대로라면 충실의무는 껍데기만 남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투자자보호센터와 같은 제도는 이런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혁은 계속돼야 한다”
심 변호사는 토론을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이룬 개혁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투자자들은 이해도가 높고 참여 의식도 강하다”며 “이들이 주주총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제도적 길을 열어주는 것이 다음 단계의 핵심 과제”라고 말했다.
이어 “제도는 결국 시장의 관행으로 채워진다”며 “부정적인 관행이 먼저 자리 잡기 전에, 주주총회·소송·의결권 행사 전반을 손보지 않으면 개혁의 성과는 쉽게 훼손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