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이사 책임은 강화됐는데…이사회는 여전히 ‘총수의 그늘’

자료=리더스인덱스

이사 책임을 대폭 강화하는 상법 개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풍경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고 있다. 법 조문은 바뀌었으나, 이사회는 여전히 실질적 권한을 쥔 ‘미등기 총수’ 아래에서 형식적 의사결정 기구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 조사에 따르면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 49곳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 총수의 등기임원 겸직 수는 2020년 117개에서 2025년 100개로 5년 새 14.5% 줄었다. 책임경영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등기이사직을 총수들이 하나둘 내려놓고 있다는 뜻이다.

표면적으로는 “이사회 책임 강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상법 개정과 중대재해처벌법 강화로 등기이사에게 민·형사상 책임이 직접 귀속되자, 권한은 유지하되 책임은 회피하는 방향으로 경영 참여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표적 사례가 이재용 회장이다. 그는 삼성그룹의 실질적 최고 의사결정권자이지만, 삼성전자 등 핵심 계열사 어디에도 등기임원으로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이사회 책임은 사외이사와 전문경영인에게 남겨둔 채, 그룹 전략과 인사, 대외 메시지는 총수가 주도하는 구조다. 법적으로는 ‘미등기’, 현실에서는 ‘최고경영자’라는 이중적 지위가 고착화된 셈이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특정 그룹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명희, 이재현 등도 미등기 상태로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신세계그룹의 경우 오너 일가 3명 모두 등기임원이 아니라는 점은, 한국 대기업 지배구조가 얼마나 ‘법적 책임 최소화’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대로 일부 총수들은 여전히 다수 계열사에 등기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처럼 10곳이 넘는 계열사 이사직을 겸직하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책임경영 강화’라기보다는, 이사회가 총수의 결정을 추인하는 통로로 기능해 온 관행의 연장선이라는 지적이 많다. 겸직이 많을수록 개별 회사에 대한 실질적 감시와 책임 수행은 오히려 어려워진다.

결국 핵심은 ‘등기 여부’가 아니다. 이사회가 누구를 견제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인지다. 총수는 미등기 상태로 전략과 권한을 행사하고, 등기이사들은 법적 책임을 홀로 떠안는 구조에서는 아무리 상법을 고쳐도 이사회는 독립성을 갖기 어렵다. 이사 책임 강화가 오히려 ‘총수의 그림자 경영’을 공고히 하는 역설로 작동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법 개정의 취지는 분명하다. 이사회가 주주와 회사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실질적으로 기능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명확하다. 실질적 경영권을 행사하는 총수에게도 그에 걸맞은 법적 지위와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가. 총수의 미등기 관행을 방치한 채 이사 책임만 키운다면, 한국 기업 지배구조는 또 한 번 ‘법은 앞서가고 현실은 제자리’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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