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만 누릴 것인가, 책임도 질 것인가”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5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은 총수일가의 ‘권한은 있고 책임은 없는’ 미등기임원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총수가 있는 77개 대기업집단에서 총수 일가가 미등기임원으로 재직하는 계열사는 198곳, 상장사 비중은 단 1년 새 23.1%→29.4%로 치솟았다.
특히 공정위가 직접 지적했듯, 미등기임원은 실질적 경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등기임원과 달리 상법상 책임과 의무에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권한과 책임의 괴리가 구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이트진로나 DN, 금호석유화학처럼 총수일가의 미등기임원 비중이 높은 기업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책임경영”을 강조하는 한국 대기업의 오래된 구호가 공허해지는 순간이다.
이 흐름과 나란히, 또 다른 장면이 재계에서 펼쳐지고 있다.
최근 연말 인사 시즌에 맞춰 오너 3세들의 ‘초고속 승진’이 줄줄이 발표된 것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 각자대표가 된 신유열 부사장, 삼양식품 전병우 전무, 농심 신상열 부사장, SPC 허진수·허희수 형제, CJ 이선호 실장, 오리온 담서원 전무 등 굵직한 기업에서 30대 임원·전무·부사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임원이 될 확률은 1% 미만이라는 통계가 무색해질 만큼, 오너 3세 승진은 속도전처럼 진행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등기임원으로서 상법상 책임을 온전히 지는가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일부는 등기임원 직함을 갖더라도, 다수는 여전히 미등기임원 형태로 ‘경영권 훈련’을 받고 있다.
총수일가가 경영 전면에 나서는 것 자체는 문제 아니다. 오너의 전략적 결단, 장기적 관점의 투자는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적 책임과 의무를 동반한 ‘이사 등기’ 없이 경영을 경험하는 구조, 그리고 책임 회피의 통로로 악용될 수 있는 미등기임원 제도는 더 이상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이 요구하는 투명성은 단호하다.
국내외 투자자들은 “오너 일가의 경영 참여가 정당하다면, 그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ISSB 기반 기후·ESG 공시가 강화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경영’은 분명한 리스크다.
지금 한국 재계 앞에는 두 길이 있다.
책임경영을 표방하면서 미등기임원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경영권을 행사하는 만큼 상법상 책임을 지는 등기임원으로 당당히 나설 것인가.
총수일가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리도, 더 빠른 승진도 아니다.
한국 자본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책임 있는 리더십이다.
오너 일가의 이름이 기업 등기부등본에 더 많이 올라갈 때, 비로소 한국 재계는 한 단계 진화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