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중 변호사 “민사책임 전환하려면 제소요건 완화·입증제도 전면 개편해야”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배임죄 폐지·축소 논의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민사로 넘기기엔 제도적 기반이 없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5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서울 여의도 한국경제인연합회 파인홀에서 ‘배임죄 폐지의 문제점과 대안 모색’ 세미나를 열었다.
김광중 변호사는 이날 토론회에서 “배임죄는 이미 법원이 70년간 해석을 통해 처벌 범위를 좁혀온 조항”이라며 “이를 폐지하려면 민사소송 제도의 전면적 개편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재산 유용이 42%…배임 폐지 시 가장 혜택 보는 건 재계”
김 변호사는 먼저 배임죄 폐지의 실질적 동기를 “재계의 요구”라고 지적했다.
“법무부가 최근 5년간 3,300건의 배임 사건을 분석한 결과, 42.7%가 ‘임직원의 회사 재산 사적 유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논의되는 개정 방향을 보면 바로 이 유형이 가장 먼저 사라질 위험이 있다.”
그는 “재계의 압박에 따라 처벌 범위가 축소되면, 결과적으로 회사 자산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행위의 상당수가 형사처벌에서 빠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중근·신동빈·이재용 사례, 민사로 입증 불가능”
그는 대표적인 대기업 배임 사건들을 언급하며 “정부가 말하는 ‘민사로 책임을 묻겠다’는 구상은 현실성이 없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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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 이중근 회장 사건: “아들 회사에 445억 원을 대여하고 세금을 회사 돈으로 냈지만, 내부 검토보고서만으로 ‘사업성 검토’ 흔적을 남겼다. 민사소송에서 이런 행위를 입증하기란 불가능하다. 형사처럼 압수수색도, 증인신문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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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신동빈 회장 사건: “서미경 씨가 지배하는 법인에 영화관 매점을 헐값 임대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민사에선 ‘헐값’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회계법인 검토보고서가 근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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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이재현 회장 사건: “계열사에 연대보증을 시켜 손해를 입혔지만, 형사에서도 ‘이득액 5억 원 이상’을 입증하지 못해 특경법 적용이 빠졌다. 민사에선 손해액 산정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는 “형사에서조차 입증이 어려운 사안을 민사로 넘긴다는 건 책임회피의 다른 이름”이라고 비판했다.
“배임죄 유죄율 94%…사회적 합의는 이미 존재”
김 변호사는 법무부 자료를 인용해 “최근 5년간 검찰이 기소한 배임 사건의 유죄율은 93~94%”라며 “이미 법원은 신의관계 배반, 사익추구 등 극단적 사례만 처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배임죄는 추상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액기스만 남은 조항’”이라며 “이 정도로 엄격하게 적용되는 제도를 없애는 건 급진적 전환”이라고 말했다.
“대표소송 1년에 6건…민사 통제는 사실상 마비”
그는 “배임 관련 형사판결 3,300건 중 대표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 1년에 280건이지만, 실제로 제기된 대표소송은 연평균 6건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민사책임은 회사가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해야 제기되는데, 대주주가 장악한 이사회가 스스로 소송을 낼 리가 없다. 소수주주가 제기하려면 주식 0.01% 이상, 6개월 이상 보유해야 하고, 패소 시 소송비용을 전부 부담해야 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맡았던 대표소송 사례를 소개하며 “200억 원 손해배상 청구 중 9억 원만 인정되고, 원고가 소송비용 90%를 부담하라는 판결을 받았다”며 “이런 환경에서 소송을 제기할 주주는 없다”고 말했다.
“형사 수단 없으면 배임행위 통제 불가능…민사소송은 증거조차 확보 못해”
김 변호사는 현행 민사소송제도의 구조적 한계를 조목조목 짚었다.
“형사에선 압수수색으로 증거를 확보하지만, 민사에선 원고가 ‘회사 문서가 존재함’을 입증해야만 법원이 문서제출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회사가 ‘없다’고 하면 그대로 끝이다.”
그는 “현직 부장판사가 ‘문서제출명령 제도는 유명무실하다’고 말할 정도”라며 “결국 원고들이 형사 고소로 돌아서기 때문에 배임 사건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설사 민사에서 이겨도 법원이 손해액의 절반 이상을 감액하고, 강제집행도 차명재산으로 막혀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100억 원을 유용해 10억 원만 돌려주면 남는 장사다. 차명계좌나 가족 명의로 돌려놓으면 집행도 어렵다.”
“공공에서 민간으로 넘어가려면, 공적 장치 줘야”
김 변호사는 “배임죄 폐지는 단순한 형사정책이 아니라 ‘공공감시의 민영화’에 가깝다”고 규정했다.
“형사처벌은 국가가 공공의 힘으로 기업 비리를 억제해온 수단이다. 이를 민사로 넘긴다는 건, 철도공사를 민영화하거나 국민연금을 민간보험에 맡기는 것과 같다. 그러면 민간에게 그만한 권한과 수단을 줘야 한다.”
그는 이를 위해 △대표소송 제소요건 완화(지분 요건 하향) △소송비용 국가부담 △미국식 디스커버리(증거개시) 도입 △책임제한 완화 △강제집행 실효성 확보 등을 구체적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만 투자자보호센터 모델 참고해야”
김 변호사는 “대만은 2003년 ‘투자자보호법’을 제정해 공적 기금으로 ‘투자자보호센터’를 설립, 집단소송과 대표소송을 센터 명의로 진행한다”고 소개했다.
이 센터는 소송비용을 선부담하고, 승소 시 배상금에서 공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또 주식 보유 요건 없이 대표소송과 임원해임청구가 가능하며, 인지대·송달료 면제 등 절차상 지원도 제공한다.
그는 “우리도 법률구조공단이나 한국거래소 기금을 활용해 비슷한 제도를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70년 이어온 형사통제 없애려면, 그만한 대안이 필요하다”
김 변호사는 “배임죄는 한국 사회가 70년간 기업 비리를 통제해온 마지막 공적 장치”라며 “이를 없애겠다면 민사·행정제도를 대대적으로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대표소송 연 6건, 문서제출도 안 되는 상황에서 ‘민사로 해결하자’는 건 공허하다. 배임죄 폐지는 급진적 제도 변화인데, 그만큼 획기적인 민사 시스템 개편이 병행돼야만 가능하다.”
그는 발표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공공영역의 감시를 민간에 넘기려면, 민간에게도 공공의 힘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임죄 폐지는 기업형 배임을 합법화하는 결과로 끝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