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기업 거버넌스 환경이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구조적 변화를 맞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정준혁 서울대 교수는 29일 대신경제연구소 주최 거버넌스 인사이트 포럼 강연에서 “지난 5년은 회사법·자본시장·거버넌스 분야에서 역사적 전환기”라며 “이 변화의 출발점은 개인 투자자 급증”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상장사 주식을 보유한 개인 투자자가 과거 500만~600만 명 수준에서 코로나 이후 1,400만~1,500만 명대로 늘어난 점을 핵심 배경으로 꼽았다. 그는 “성인 유권자의 약 40%가 주식 투자자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라며 “과거 소수 전문가의 이슈였던 자본시장·거버넌스 문제가 이제는 정치적, 사회적 의제로 올라섰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선거 국면에서 투자자 보호 공약이 주요 의제로 등장하는 흐름도 같은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변화는 법·제도 개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 교수는 이미 시행된 1차 상법 개정의 핵심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한 점을 들며 “이제 회사 의사결정에서 주주 이익을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구조가 제도화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2차 상법 개정에 따라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의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가 이뤄지면서 “이사회에 이질적 성향의 인사가 들어올 가능성이 커졌고, 이사회 토론과 의사결정 난이도도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향후 과제로는 자사주의 원칙적 소각, 합병·분할 시 평가체계 개선, 쪼개기 상장 규제 강화, 의무공개매수제도, 기관투자자 스튜어드십 강화 등이 거론된다고 소개했다. 그는 “아직 전면 시행되지 않은 제도라도 시장은 이미 ‘시행된 것처럼’ 반응하고 있다”며 “과거 관행에 기댄 의사결정은 자본시장에서 강한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 교수는 최근 증시 상승을 설명하는 틀로 ‘파이 늘리기’와 ‘파이 나누기’를 제시했다. 기업 전체 가치라는 파이를 키우는 산업·성장 요인과, 지배주주 사적 이익을 줄여 일반 주주 몫을 늘리는 거버넌스 개선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최근 상법 개정 등은 ‘파이 나누기’를 더 공정하게 하는 방향이고, AI 등 산업 정책은 ‘파이 늘리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대응 방향으로는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모든 주요 의사결정에서 “회사에 어떤 영향이 있는가”뿐 아니라 “주주 이익과 주가에 어떤 영향이 있는가”를 함께 검토할 것. 둘째, “법적으로 가능하냐”는 최소 기준을 넘어서 주주 이익 관점에서의 정당성을 점검할 것. 셋째, 사업보고서·증권신고서 등 공식 문서를 포함한 주주 소통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이사회 책임과 관련해서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언급하며 “충분한 정보에 기초해, 회사와 주주 이익을 위해, 객관적으로 합리적 결정을 했다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다만 “실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충분한 정보에 기반했는지’ 여부”라며 의사결정 과정의 자료 축적과 기록 관리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교수는 “주주 이익 보호 흐름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라며 “거버넌스는 이제 기업 내부 문제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의제이며, 기업 의사결정 시스템에 이 인식이 체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