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B그룹이 8년 만에 다시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언했다. 김남호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창업자 김준기 회장의 오랜 측근인 이수광 전 DB손해보험 사장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 표면적으로는 글로벌 무역전쟁, 산업구조 재편, AI 혁명 등 대내외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경영 능력이 검증된 베테랑을 전면에 세운 조치다. 그러나 이 인사가 ‘진정한 전문경영인 체제’로 불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짙다.
창업자 그늘 벗어나지 못한 경영
DB그룹이 말하는 전문경영인 체제는 일본 도요타식, 즉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번갈아 경영을 맡는 모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 인사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오너 리스크’나 경영 세대교체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기보다, 창업자의 영향력을 유지한 채 측근에게 경영을 맡긴 ‘형식적 전환’에 가깝다.
이수광 회장은 김준기 회장과 고려대 동문이자 동갑내기이며, 그룹 합류 이후 40여 년간 그의 직속 부하로 일했다. 사실상 창업자의 의중과 인맥이 그대로 반영된 인사다. 전문경영인이 경영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과거 실패의 그림자
DB그룹의 역사는 굵직한 도전과 그에 따른 뼈아픈 실패로 점철돼 있다. 반도체·전자·철강·건설 등 기간산업 확장 전략은 IMF, 글로벌 불황, 산업 트렌드 변화와 맞물려 부메랑이 됐다. 2013년 이후 자산 매각과 구조조정이 이어지며 ‘동부’라는 이름마저 잃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지배구조 투명성, 경영 책임성 강화, 신성장동력 확보 등 근본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남호 명예회장 체제에서도 핵심 계열사 CEO 대부분이 창업자 시절부터 중용된 측근들이었고, 실질적인 인사권 역시 창업자가 행사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진정한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려면
전문경영인 체제는 ‘간판 교체’가 아니다. 경영권과 인사권, 전략 결정권이 실질적으로 이양되고, 투명하고 독립적인 이사회 운영과 견제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한다. 오너의 영향력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작동한다면, 시장과 주주는 이를 ‘전문경영인 체제’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DB그룹은 금융 부문 편중을 해소하고 제조·신사업 부문을 키워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AI·반도체·글로벌 금융 등에서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려면, 창업자 중심의 폐쇄적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창업자 측근 인사를 ‘전문경영인’으로 호명한다고 해서 DB그룹이 과거와 결별했다고 믿을 이는 많지 않다. 이름뿐인 체제가 아니라, 실질적 권한 이양과 경영 투명성 확보를 통해서만 ‘진정한 전문경영인 체제’로 거듭날 수 있다. 그것이 DB그룹이 지난 실패의 교훈을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