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은 최근 합병 발표 자리에서 “상속·증여세로 못해도 6~7조원은 내야 할 것이기에 승계할 방법이 없다”면서 “(상속이 어려워) 건강 관리도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서인지, 최근 여당은 상속·증여세 인하를 검토하는 모양새다.
기업인들은 ‘경영권’을 잃는다고 아우성이다. 50억원이 넘는 재산을 상속받으면 세율은 50%다. 상장사 대주주는 더욱 높은 세율이 적용된다. 지분 절반 이상을 잃어 기업 경영자 자리의 세습이 어렵다는 호소다.

“헌법에 경영권이 나오나”
다만 행동주의 투자자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가 최근 국회 토론회 자리에서 한 말이 있다. 그는 경영권 방어를 운운하는 재계 인사들을 향해 “경영권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아니다”라면서 “왜 지켜달라고 하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경영권에 관한 논의의 인식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업가들은 대주주이면서 최고 경영자의 자리를 자녀에게 ‘당연히’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그 권리가 해쳐진다는 것이 경영권 방어의 논리다.
하지만 이것이 어느 사회에서나 당연한 것은 아니다. 특히 글로벌 대기업이 3~4대에 걸쳐 경영자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들다. 경영에 참여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대주주를 대표하는 자리에서 다른 주주들과 함께 목소리를 낼 뿐이다.

북한은 정권 세습…남한은 기업 세습
기업들은 가업(家業) 승계를 포기하게 된다는 말을 한다. 가업은 말 그대로 가족들이 모든 일을 하는 가족 안의 일에 불과할 때나 쓰는 말이다. 이미 상장사가 될 정도면 기업은 창업자 가족들만의 것이 아니다.
협력 업체, 노동자들, 주주들, 소비자까지 그 기업과 관계된 이해 관계자들은 가족 몇 명과 비교할 수 없이 많다.
그러니 서로 다른 전제를 깔아놓은 사람들의 대화는 결론이 나지 않는 평행선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치 김씨 ‘백두 혈통’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북한과 누구나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남한 사이에 놓인 휴전선 만큼이나 넘기 어려운 차이다.
지분 감소로 인해 경영자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면 그것이 억울한 일일까. 최대주주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 기업의 경영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입사 후 곧바로 ‘경영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핵심 업무를 다루고 빠르게 임원으로 승진 한다.
남들이 수십년을 일해야 다는 임원을 수십년 동안 할 수 있으니, 회사에서 받아가는 급여만 해도 보통 임직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애초에 출발선부터가 다른 경주다.
최대주주인 부모가 생존한 동안 경영진으로 일하며 능력을 검증받을 기회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다른 주주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할 자리라면 애초에 맞지 않는 자리라고 보는 편이 맞다.

2세 경영자, 주식 줄어든 대신 다른 주주들 선택받으라
대주주의 자녀들이 경영자가 되지 못했다고 기업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무너진다면 그것도 제대로 된 기업은 아니다.
조직은 그 구성원의 공백을 딛고 나아갈 수 있는 생명체가 돼있어야 한다. 그 구성원이 창업자와 대주주일지라도 말이다.
만일 대주주의 자녀가 유능한 경영자라면 소액 주주들이나 기관 투자가들도 그들이 계속해서 경영을 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돈’을 그 회사에 투자한 사람들이다. 회사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마치 대주주만이 책임 의식을 가진 진짜 주주고, 소액 주주들은 외부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전제다. 모든 주주들이 가진 주식 수만큼 권리를 행사한다는 주주평등주의가 자리 잡히지 않은 결과다.
기업들은 그동안 높은 상속·증여세 때문에 ‘일감 몰아주기’와 같은 편법 증여가 생겨났다고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세금이 많아서 도둑질을 했다”는 황당한 해명이나 다름없다. 일감 몰아주기 역시 대주주는 특별 주주로, 소액 주주는 외부 관계자 정도로 생각하는 국내 기업의 사고 방식이 반영된 행태다.

저성장의 늪에서 늘어난 복지비용…상속·증여세로 막아야
상속·증여세는 현재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대주주의 자녀라도 무능하다면, 전문 경영인을 최고 경영자로 세울 수 있는 지배구조를 확립시켜야 한다. 유능한 사람도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중요 문제를 혼자 결정하지 않는 이사회라는 이름의 집단 지도 체제다.
그렇게 뽑힌 전문 경영인이 성과를 못 내면, 다른 경영자를 주주들이 고르면 된다. 그것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선 경영자가 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기업은 당연히 아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에 정치권이 동조해 상속·증여세 감면 논의가 나오는 것 자체가 한심한 일이다.
상속·증여세를 부과하지 않는 나라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런 나라들은 다른 명목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가는 나라들이다. 어쩌면 높은 상속·증여세율이 기업이 세습되면서 망가지는 일을 막는 장치가 될 수 있다.
기업이 잘못된 세습 경영으로 무너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는다. 기업은 아니지만, 북한이라는 가장 큰 사례가 가까이에 있다.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 한국은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니 부유층에게서 상속·증여세를 거둬, 빈곤층에게 돌아가도록 재분배를 하는 기능을 국가가 해야 한다. 감세는 오히려 중산층 이하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감소하면 사실상 소득이 늘어나게 된다. 이는 소비를 늘리고 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상속·증여세 감소는 소비 진작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거둬들일 세금 규모는 엄청나게 줄어들 것이다. 과도한 국가 부채와 인구 고령화로 복지 비용 부담이 커진 한국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상속·증여세 완화는 재벌에게 날개 하나를 더 달아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